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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4, 2023

서울의 봄 타임라인 – 프라하의 봄 과 베이징의 봄

서울의 봄 타임라인 – 프라하의 봄 과 베이징의 봄

김성수 감독의 서울의 봄이 곧 개봉한다. 영화를 보기 전에 공부를 해 두는것이 영화를 이해하기에 도움이 될듯 하여 깊지 않고 얇고 넓게 공부해 보았다.

서울의 봄은 1979년 10.26 사건으로 유신체제가 사실상 붕괴한 후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신군부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힐 때까지 한국에 민주화의 희망이 찾아왔던 기간(1979년 10월 27일 ~ 1980년 5월 17일) 을 뜻하는 말이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의 봄에 빗댄 것이다. 프라하의 봄처럼 서울의 봄다 잠깐의 봄으로 끝났다.

서울의 봄 타임라인

1979년 10월 26일 – 박정희 서거

16년의 집권했던 , 그리고 유신헌법으로 평생 권력을 사유화 하려던 박정희를 심복 김재규가 사살 하였다.

1979년 10월 27일 – 최규하 국무총리 대통령 권한대행

김재규가 체포된 후 국방부 회의 후 당시 국무총리인 최규하가 권한대행이 되었고 박정희 시해로 인한 계엄의 선포로 인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대통령 권한대행과 함께 정국을 이끌게 된다

여기서 최규하의 선택이 역사의 변곡점으로 작용한다.
계엄령을 선포 할때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 것이다. 이는 사실상 군 통제권을 포기한 뜻이다. 전국에 비상계엄이 내려지면 총 책임은 대통령이 맡게 되지만 일부로 제한하면 계엄 총 책임은 국방부 장관이 총 책임을 맡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 현대사의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12.12 군사반란의 씨앗을 남겼다는 것이다.

이때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이 전두환이다.

1979년 10월 28일 – 전두환의 움직임

전두환은 서거 다음날 수사를 빙자하여 윤일균 중앙정보부 1차장, 검찰총장, 치안본부장을 보안사로 불러들여 국가원수 시해 책임을 물어야 하지만 협조하면 체포하지 않겠다는 압박을 하며 세력을 넓혔다. 이에 따라 사실상 검찰,경찰,헌병까지 장악하게 된다.

한날 한시에 권력서열 2위~3위 인 차지철과 김재규가 무력화 되면서 사실상 권력의 야망이 눈을 뜬게 아닌가 싶다. 시해 다음날 전두환의 움직임을 보면 박정희의 서거를 예측했다는듯 매우 치밀하게 쿠데타를 진행 시켰다.

12월6일 –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됨
12월7일 – 긴급조치 9호를 해제

1979년 12월 12일 – 12.12 군사반란

1979년 12월 12일 대한민국 내 불법 사조직인 하나회의 일원 전두환이 주도하여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대통령 시해사건 관련 혐의로 연행하며 12.12 군사 반란이 성공한다.

당시 방학이 시작된 직후 였던 터라 대학가의 시위는 일어나지 않았고 개학을 맞이한 1980년 3월에 시위가 본격화 된다. 매일 신군부에 대한 규탄 집회가 끊이질 않았다.

1980년 3~4월 학원 민주화 열풍

3월 개강과 함께 학생들은 어용교수 퇴진을 외쳤다. 어용교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난 대학은 18개 학교 였으며 참가자는 8천여명에 이른다.

4월 24일 서울 14개 대학 361명의 교수들은 학원민주화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한다. 내용은 사학의 족벌체계 비판, 군사교육 개선책 모색, 재임용제도 철폐 교수회의 기능강화 ,대학별 교수협의회 구성등 대학교육과 직,간적접으로 연관된 사항들이다.

1980년 4월 9일 병영집체 훈련 거부 사건

유신정권 시기부터 당시 대학교 1학년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군대에 들어가 열흘간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다 박정희가 죽고 민주화 바람이 불자 학생들은 당연히 이 훈련에 반발하여 병영집체훈련 폐지를 요구하는 시위를 시작으로 여러 대학으로 확산 된다.

1980년 5월 12일 – 북한 남침설 유포

학생들의 시위를 신군부는 ‘불순분자들의 책동’으로 몰아갔고 학생 시위가 북한의 사주에 의해 일어났다고 주장하면서 북한 남침설 위협까지 유포시켰다. 이미 5월 12일 비상국무회의에서 중앙정보부 담당국장이 “북한군 특수 8군단이 행방불명되었다”며 북한의 침투 가능성을 제기해 휴전선 동태에 대해 보고했다.

1980년 5월 14일 – 서울역 회군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 모인 서울지역 27개 대학 총학생회는 학생 시위의 거리 진출 여부를 토론한 끝에 우리의 평화적 교내시위는 끝났다며 교문을 박차고 나와 싸울것이라고 결의했다.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총궐기 에 맞서 신군부는 ‘소요진압본부’를 세워 진압군 투입 지시를 내렸다. 이후 7만여명의 대학생들이 서울 중심가에 구름처럼 모였고 지방 11개 대학 수만여 학생들도 모였다. 이에 신민당 국회의원 66명 과 지식인 135명은 계엄 해제 를 촉구하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한다.

서울역에 10여명의 대학생이 모여 계엄철폐를 외치고 민주화 일정 제시를 요구했다. 이에 진압군 병력 역시 시내 도처에 진주 했는데 이는 서울뿐만 아니라 부산,대구, 인천,목포,청주,춘천,천안 등 지방 주요도시들도 마찬가지 였다.

역사의 또다른 변곡점으로 기억되는 서울역 회군이다.

서울대총학생화징, 고려대 총학생회장, 서울대 복학생 협의회 대표, 서울대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 , 서울대 학생처장, 등은 생각보다 많은 인파가 모이자 통제못할 것을우려하여 해산시킬것인가, 군중을 이끌고 진군할 것인가 격론이 벌어졌다.

지도부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황에서 충돌이 벌어질 경우 대규모의 유혈사태가 생길 수 있다고 판단해 이날은 해산하고 다시 준비를 해 다음에 집결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반발하는 지도부도 있었지만 결국 해산결정을 발표한다.

그후 신군부는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통하여 사실상 정권을 장악하고 야당정치인과 시위 주모자들을 체포해 학생들이 해산했음에도 유혈사태는 발생한다.

이날 대학생 지도부가 전 국민과 함께 결의를 다지고 신군부에 대해 끝까지 저항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신군부의 총,칼이 광주로 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김대중은 휴혈사태를 막으려 학생들의 시위 자제를 호소하는 입장을 전했다. 김대중의 예상대로 대한민국 수도에서 대규모 유혈 사태가 발생했을까 아님 신군부가 국민앞에 무릎을 꿀었을까?

1980년 5월 18일 – 광주민주화운동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신군부가 권력과 군을 완전히 장악했기 때문에 결국 조직적인 저항은 광주에서만 이뤄질 수 있었다. 그리고 광주에서 일어난 5.18 민주화운동을 신군부가 보낸 반란군이 학살로 제압하면서 서울의 봄은 막을 내렸으며 한국의 민주화는 6월 항쟁이 일어난 1987년까지 미뤄지게 되었다.

프라하의 봄

1979년 10.26 부터 대규모 서울집회가 해산될때까지 서울의 봄이라 불리는 이유는 프라하의 봄이 있었기 때문이다.

프라하의 봄 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비에트 연방이 간섭 하던 체코슬로바키아 에서 일어난 민주화 시기를 이르는 말이다. 이 시기는 1968년 1월 5일에 슬로바키아의 개혁파 가 집권 하면서 시작 되었으며, 8월21일 소비에트 연방과 바르샤바 조약 회원국이 체코슬로바키아 침공하여 개혁 짧은 민주화의 열망이 중단된다.

베이징의 봄

베이징의 봄은 1970년대 말에 중국에서 일어난 정치적 자유화 운동을 말한다.  베이징의 봄 또한 프라하의 봄에서 따왔다.

문화대혁명과 사인방, 화궈펑 등의 실정으로 인해 중국에서는 정치적 불만이 커졌고 이를 이어 받은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을 해나가며 일시적으로 정치적 자유를 허용하였다.

1978년 11월부터 1979년 12월까지 민주벽 운동이라 하여, 중국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는 벽보들이 베이징의 관청 벽에 붙기도 하였다. 덩샤오핑은 비판하는 내용들을 묵인하였으나 1980년대의 엄타 등 사회적 분위기가 다시 경직되고 천안문 6.4 항쟁을 거치며 자유화, 민주화 운동은 완전히 탄압을 받게 되었다.

당시 세계 정세는 어떠했을까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한국은 서울의 봄으로 민주화의 열기가 뜨거울 때 1979년 12월 소련은 카불의 친소련 정부를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파병한다. 소련군은 서구로부터 자금과 무기를 지원받은 이슬람 반국 무자헤딘과 전쟁을 치렀다. 10년간의 전쟁으로 아무 성과 없이 6만명의 사상자를 낸후 1989년 소련은 철수 한다.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 발발

1980년대에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는 이슬람 원리주의의 부흥 이라는 동일한 갈등에 직면했다. 두 나라 모두 세속 국가였다. 1980년 9월 이라크는 아야톨라 호메이나에 의해 새로 수립된 이슬람 국가 이란을 상대로 전쟁을 개시했고, 전쟁은 8년간 계속 되어 40만명 이상의 인명피해를 낸다.

마무리

서울의 봄 에 대해 들여다 보고 타임라인을 정리해 보았다. 프라하의 봄, 베이징의 봄 등 세계 각지의 짧지만 강렬했던 민주화의 열망으로 불타올랐으나 권력의 폭력으로 봄처럼 짧게 마감된다.

전문지식이 전무하다보니 머릿속에 수많은 문장이 지나가고 있지만 이렇게 서투른 마무리를 할수 밖에 없는것이 아쉬울 뿐이다. 향후 역사적 소향이 더욱 쌓인다면 나름의 해석을 첨언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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