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를 넘어 서양과 아랍 충돌 의 관점에서 역사를 되집어 보았다.
이는 긴~ 역사에 유대인이 받은 탄압은 어떤 민족보다 가혹했다. 그들이 그들만의 땅을 갈망하게 된 역사적 디아스포라 와 시오니즘을 알아 보았다.
유대인 디아스포라
왜 이스라엘은 2000년 을 떠돌며 2000년이 자나 무리한 전쟁을 해서라도 땅을 되찾으려 하였는가
무수한 전쟁과 제국의 변화 속에 유대인의 박해의 역사,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알게 되었다.
기원전 (구약성서) 신의 지시를 받은 모세는 이집트의 노예계층인 유대인을 규합하여 미디안 땅으로 현 아라비아 반도로 이주하게 된다.
디아스포라 대문자 Diaspora를 써서 팔레스타인 또는 근대 이스라엘 밖에 거주하는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어 왔으나 소문자 diaspora로 의미가 확장되면서 이주민, 국외로 추방된 난민, 초빙 노동자, 망명자 공동체, 소수민족 공동체와 같은 의미도 지니게 되었다.
고대시대 유대인의 추방
다시 로마제국 시기에 제국으로 부터의 박해 이후 유대인은 팔레스타인을 떠나 북아프리카 그리고 나중에는 유럽의 상당 지역에 장착하게 된다.
그리고 저마다 가지게된 자신들의 새나라에서 문화,지식,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중세 들어 유대인을 추방하는 곳들이 생겨나면서 그들의 강제 이주가 다시 시작되었다.
중세시대 유대인의 추방
십자군 전쟁을 겪으며 대량학살을 당해야 했지만. 11세기와 12세기는 중세 독일의 유대인에게 황금시대에 해당된다. 그러다가 1290년 잉글랜드를 시작으로 서유럽이 잇따라 유대인을 추방하면서 동쪽의 프라하와 빈을 향해 이주의 물결이 끊이지 않았다.
중세인이 유대인에 대한 반감의 원인은 다양하겠지만 다음의 글로 예를 들어 보겠다.
위 인용구는 9세기 이슬람의 과학자 이자 철학자 이븐 쿠라다드바 에의 한 유대인의 평가이다.
현대시대 유대인의 추방
반 유대인 정서는 근대를 지나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다. 유럽 전역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을 아라비아 상단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모여드는 계기가 있었다.
드레퓌스 사건
1870년~1871년 프로이센 대 프랑스 전쟁에 패배한 프랑스에는 애국주의와 반독일 감정이 높았다. 전 유럽은 민족주의로 인해 반유대주의가 팽배해 있었다.
1894년 프랑스 정보국 요원이 파리의 독일대사관에서 몰래 빼네온 문서를 통해 프랑스군 내부에 독일 스파이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 수사가 진행되고 육군 포병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범인으로 지목된다.
그는 독일계 유대인이고 당시 프랑스 사람들의 반독일, 반유대 감정이 고조 되었을 때이다.
이후 재판으로 드레퓌스는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그는 무죄를 주장했지만 여러 무죄의 정황이 있었느나 묵살 되었고 악마의 섬에 유배되었다.
2년후 한 신문사의 제보로 프랑스 육군의 다른 장교가 진범 이었다는 정보가 나타났다.
프랑스의 지식인 에밀졸라를 비롯하여 수많은 지식인이 프랑스 국방부를 강하게 비판하였고 세계 언론도 동조하자 문서를 조작한 진범인 앙리 중령이 자살하게 된다. 이후 재심을 결정하고. 드레퓌스는 10년형을 선고 받았으나 대통령에 의해 사면된다.
이는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 전역에 보수 민족주의 , 보수 기독교, 반 유대인 정서가 팽패 했다는것을 반증한다.
홀로코스트
홀로코스트(Holocaust, 1933~1945)는 나치 독일 정권이 동맹국들과 협력자들과 함께 600만 유럽계 유대인들을 제도적으로 탄압하고 조직적으로 학살한 사건이다.
홀로코스트의 근간은 반유대주의 였다. 유대인을 향한 증오와 편견은 나치 이데올로기의 기본 교리였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 탄압은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변화했다 이 과정에서 600만 유대인이 학살된다.
노란 다윗의 별은 나치가 유대인 가슴에 박아노은 노란 딱지이다. 오염을 상징하는 노란 딱지는
다른 포스트에 노란색의 색채심리 – 유튜브 노란딱지는 왜 노란색 인가 를 참조해 주길 바란다.
시오니즘
시오니즘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민족주의 운동이다.
위 드레퓌스 사건을 지켜본 후 충격을 받은 유대계 오스트리아인 테오도어 헤르츨이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1회 시오니즘 세계대회를 개최하여 본격적으로 유대인 국가 건설 작업이 시작되었다.
1948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땅에 독립국가를 건설함으로써 2000년을 이어온 시오니즘의 목표가 실현 되었다.
역사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것은 1차 유대-로마 전쟁이 실패로 끝나고 예루살렘이 함락 되었을 때부터 유대인의 소망이었다. AD135년 바르코크바의 반란으로 이스라엘을 되찾으려 했지만 역시 샐패 하였다.
시작
시오니즘이 역사에 기록된 것은 1799년 나폴레옹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을 위한 나라를 건국하자는 제안을 했다. 시온주의자의 지지를 얻기위한 정치적 선택이었다.
1894년 프랑스에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은 유대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19세기에는 오스만 제국이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곳에 살고 있던 50만명 중 유대인은 2만명에 불과했다. 러시아 제국에서 유대인 박해가 일어나자 유대계 러시아인들 소수가 이스라엘로 귀하하면서 알리야(이스라엘로 이주사는것)가 시작 되었다.
조이 인사이트
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쟁을 바라보며 그 들의 역사는 어떠했는지 를 공부 해보았다.
서양과 아랍 충돌 의 역사로 시각을 바꾸니 역사는 계속 과거로 과거로 기원전 까지 찾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유대인에게 뿌리깊은 박해의 역사 디아스포라 와 시온주의 도 들여다 보았다.
2000년 넘은 그들의 땅에 대한 갈망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이 글은 “더 타임즈 세계사” 를 읽고 인사이트를 얻어 작성한 포스트 입니다
인류의 기원 부터 현대 까지 개별역사를 떠나 전 지구사의 빅 히스토리를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서양과 아랍의 충돌이라는 주제로 긴 역사를 확인해 볼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