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3월의 첫 날은 공휴일이다. 3·1 일제시대에 유관순을 포함한 우리 선조들이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 를 외쳤던 날로 알고 있는게 내 지식의 전부이다. 사안의 앞뒤좌우 3·1운동 타임라인 의 정보가 부족하다.
모든 독립운동은 숭고하다. 그러나 왜 3·1에 공휴일로 지정하여 기념할까? 그리고 우리는 독립을 외칠때 세계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을까? 1919년 3월의 전후좌우를 알아보자.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3·1절 그날을 보다 자세하게 들여다 보고 인사이트를 얻었다.
1919년 3·1운동 타임라인
- 1월21일
고종 덕수궁에서 사망함, 일본인에 의한 독살이라 소문이 퍼짐
- 2월1일
대한청년단 김규식을 프랑스로 여운형을 러시아로, 장덕수를 일본으로 김철, 서병호, 국내로 보내 독립운동을 지휘하게함. 김동인, 전영택,주요한 등 일본 도쿄에서 최초의 문예동인지<창조>를 창간함
- 2월16일
미국의 대한인국민회가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 독립 청원서를 제출함
- 2월18일
조선체육협회가 발족됨 - 2월27일
보성사(普成社)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함 - 2월28일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이 창간됨 - 3월1일
민족대표 33인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함,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남 (3·1운동) - 3월3일
고종의 국장을 거행함
- 3월3일 – 사천 학살 사건
한예헌(韓禮憲), 이진식(李鎭植), 최승택(崔承澤), 김병주(金炳疇) 등의 주도로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일본 헌병대는 시위 군중에 대한 무차별 총격으로 73명을 학살했다. 그러나 시위군중은 학살에도 불구하고 시위를 계속하여 헌병 주재소에 불을 지르고 헌병 2명을 타살(打殺)했다 - 3월5일 – 군산 만세운동
전북 군산에서 영명학교 졸업생 김병수가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시위에 참가하였다. 시민 3만여명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시위 당시 일제의 폭력진압으로 인해 53명이 사망하고, 72명이 실종되었으며, 195명이 부상을 당해 만세운동으로 인한 사상자로서는 전라북도 내에서 가장 많은 규모였다. - 3월6일 – 곽산 학살사건
곽산 그리스도교회를 중심으로 봉기하여 점차 수천명이 시위에 동참하자, 일제는 독립운동가 박지협(朴志協)을 주동 혐의로 체포 직후 타살(打殺)하고, 체포한 시위군중 100여명 중 50여명이 잔인한 고문으로 사망했다. 일제는 시위 진압 과정에서 군중에 대해 무차별 총격을 가했으며, 광견(狂犬)을 죽이는 데 사용하던 쇠갈고리로 시위군중 수천명을 참살했다. 일명 곽산의 참살(郭山一慘殺)이라고도 불린다. - 3월 16일 – 합천 학살 사건
경남 합천군 야로면에서 주민들과 해인사의 승려들이 모여 시위를 벌였는데, 그 참가자가 1만여명에 이르렀다. 일본 군경이 발포하여 3명이 죽고 다수가 부상당했다. 3월 22일에는 상백,백산,가회,삼가 등 다섯 면의 주민 3만여 명이 모여 만세 시위를 벌였다. 질서있는 평화시위를 벌였음에도 일본군이 무차별 발포하여 42명이 사망하고 100여 명이 큰 부상을 입었다. 같은 날 초계면에서도 유림과 학생의 주도로 8천여명이 모여 만세 시위를 벌이자 역시 일본군이 발포하여 5명이 죽고 수십명의 부상자를 냈다. - 3월21일
러시아의 대한국민의회가 러시아령 임시정부 수립을 선언함 - 4월1일
유관순 천안 아오내(병천)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지휘하다 체포됨. - 4월4일 – 전북 남원 학살 사건
남원군 덕과면장이었던 이석기가 4월 3일을 기해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고 군중 800여명을 모아 식수기념식이 끝나자 19개 면장 등이 만세를 선창하고 군중들이 호응하여 남원-전주 간 도로를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다. 다음날인 남원읍 장날에 장터에서 또다시 만세 시위가 벌어졌다. 군중 1000여명이 모여 시위를 벌이자 수천여명의 주민들이 다시 합세해 대규모 시위가 벌어져 읍내 전체가 시위 군중으로 가득했다. 일본군은 시위대에 총격을 가해 8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10여 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20여명이 체포되었다. - 4월4일 이리장날 만세운동
군산 영명학교 교사 문용기가 이리(지금의 익산시) 장날을 이용하여 일어난 독립운동을 주동하였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군중들은 문용기의 지휘에 의해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가지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대열을 지어 시가를 행진하였다. 일제는 창검과 총·곤봉·쇠갈고리를 휘두르며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 때 문용기 열사는 태극기를 들고 만세운동을 하다 왼팔 과 오른팔이 순차적으로 잘리고 급기아 두 팔을 잃은 몸으로 만세를 외치자 일제에 의해 순국 하였다. - 4월10일
민족운동지도자 29인, 중국 상하이에서 임시의정원을 개원함: 의정원법을 통과시키고 내각을 조직함. - 4월11일 – 화수리 학살 사건
시위군중이 화수리 주재소에 불을 지르고 시위대에 총격을 가한 일본 순사 1명을 타살하자 헌병과 경찰을 동원해 민가에 불을 지르고 뛰쳐나오는 사람을 총으로 쏘거나 칼로 찔러 마을 주민 수십여명을 학살했다. - 4월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함 - 4월15일 – 제암리 학살사건
수원 향남면 제암리(지금의 화성시)에서 장날을 틈타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던 일본 육군이 4월 15일 제암리의 제암리교회에 성인 남자들을 모아놓고 불을 질러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 맹산 학살 사건
평안남도 맹산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는데, 사건 며칠 후 일본군이 지도자 한사람을 체포하여 헌병분견소에 가두고 고문을 하자 군중들이 몰려와 지도자의 석방을 요구하자 일본 헌병이 이들을 분견소 안마당에 끌어들인 뒤 문을 잠그고 60여명을 총살한 사건이다. - 대구 학살 사건
대구에서 2만 3천 명이 시위를 벌여 일본군에게 113명이 총살되었고, 87명이 부상당하였다. 김용해의 아버지가 이 시위의 주모자로 독립선언을 낭독했는데, 김용해는 체포하러온 일본군과 맨손으로 대항하다가 칼에 맞아 중상을 입었으며, 부자가 투옥되어 며칠 후 사망하였다.
1919년 3·1운동 타임라인 당시 세계 전후좌우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의 팽팽한 교차점에 있었음을 확인 하였다. 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과 오스만 제국은 붕괴되었지만 대영제국과 프랑스 제국은 1919년 이후 최대의 영토를 확보한다. 그럼에도 전쟁이 아시아와 중동에서 제국주의의 기반을 무너뜨렸고 1930년엔 대공항으로 제국주의는 막을 내린다.
러시아 혁명
1917년 러시아 제정이 붕괴되었다. 8개월 동안 자유주의자와 온건파 사민주의자들은 의회 체제를 확립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10월 레닌이 이끄는 급진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독재체제를 수립했다. 이 체제는 군사 개입과 내전, 경제 위기에도 살아남아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을 건국 한다.
1919 파리 강화 회의 – 민족자결주의
1차세계대1차세계대전 이후 연합국이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1월 18일 파리에서 회담이 열린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14개조의 전후처리 원칙을 밝혔다. 여기서 그는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라는 소위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하였다.
전적으로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발언이었다. 당시 유럽의 제국주의에 대한 견제가 필요했던 미국은 이 회담을 기점으로 국제질서에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이후 1919년 6월 28일 연합국과 독일은 베르사유조약을 체결한다. 베르사유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독일은 나락의 시작 이자 다시 전쟁의 불씨가 타오르는 샘이 되었다.
인도 동시대에 반영운동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로 우리와 상황이 다르지 않았다. 간디에 의해 비폭력 저항운동이 시작 되었다. 이는 3,1운동의 영향이 있냐 없냐에 대해 갑론을박이 있어 명확하게 팩트를 전달하긴 어려울듯 하지만 영향이 없다고는 할수 없을것 같다. 이미 동남아시아는 독립운동의 계기로 한국의 3,1 운동을 삼기도 한다.
1919년 4월 13일 영국군이 반영집회 참가자들에게 무차별 발포하여 16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3,1운동과 거의 동시대 아닌가 당시 영국의 세력을 등에 엎은 일본으로서는 영국의 독립운동에 대한 무차별 진압이 타산지석이 되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일본은 한발 더 나아간다 사망자수는 비교하기 어렵겠지만 잔인성은 영국의 학살을 넘어서는듯 하다. 자료를 찾아보고 참아 공유할수 없는 사진자료들을 확인하였다.
바우하우스 설립 – 1919년 4월12일
우리가 독립의 열기가 끓어오를때 정확하게 같은 시기에 유럽의 독일은 혁신의 아이콘 바이마르국립 바우하우스 학교를 공식 승인한다.
바우하우스는 20세기 초 독일에서 시작된 혁신적인 예술, 디자인, 건축 학교로, 기능성과 단순함을 강조하는 동시에 예술과 공예를 통합하여 현대 디자인의 기초를 마련한 학교이자 실험실이었다.
인테리어, 건축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아실만한 루이스 반데로에, 칸딘스키, 파울클레, 오스카슐레머, 디터람스 등 현대 산업디자인, 건축, 회화의 흐름을 이끌었던 인물들이 바우하우스 출신이거나 영향을 받은 인물 이다.
독일이 1차세계대전을 패배하고 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핵심 인물들이 미국으로 이주하였고 미국의 번영을 가져온 계기라 해도 되겠다.
zoinsight
3,1운동 기점의 세계 전후좌후를 들여다 보았다. 우리만의 독립을 위한 저항운동이 아닌 세계흐름 안에서 들여다 보니 제국주의의 붕괴와 민족자결주의의 등장에 독립적 민족으로서 매우 자연스럽고 자랑스러운 역사이다. 세계적 흐름으로서 고종의 죽음으로 시작하여 수많은 학살을 견뎌 임시정부 수립까지.
임시정부 수립은 단순히 독립운동의 저항의 중심 을 넘어 새로운 나라의 정책을 발표하는 매우 중요한 순간이다.
아래 1919년 4월 11일 공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첫 헌법을 들여다 보자.
-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
- 제2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통치한다.
-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다.
- 제4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종교,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통신, 주소 이전, 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누린다.
- 제5조 대한민국의 인민으로 공민 자격이 있는 자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다.
- 제6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교육, 납세 및 병역의 의무가 있다.
- 제7조 대한민국은 신(神)의 의사에 의해 건국한 정신을 세계에 발휘하고 나아가 인류문화 및 평화에 공헌하기 위해 국제연맹에 가입한다.
- 제8조 대한민국은 구 황실을 우대한다.
- 제9조 생명형, 신체형 및 공창제(公娼制)를 전부 폐지한다.
- 제10조 임시정부는 국토 회복 후 만 1개년 내에 국회를 소집한다.
매우 민주주의적이고 합리적이지 않은가? 자료를 찾아보니 독립운동가 조소앙 이 초안을 작성하였다.
아래는 현재 대한민국헌법 전문이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ㆍ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ㆍ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ㆍ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대한민국헌법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