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전쟁사는 993년 부터 1019년 까지 총 3차례에 걸쳐 침략이 되었는데 1차는 서의의 단판 2차는 양규의 활약, 3차는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침략을 막아 내었다. 거란은 고구려 땅을 지배했던 발해를 멸망시킨 국가로서 우리 민족에게 뼈아픈 역사가 있다. 고려와 거란이 어떻게 충돌하고 3번의 역사를 통해 동아시아의 변화가 있었는지 공부해 보았다.
고려 , 거란 시대배경
고려는 건국 직후 북진 정책을 수립하고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자 하였다. 당시 만주 일대에서는 거란이 강성하여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려를 위협하고 있었다.
고려와 거란의 관계는 태조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 때, 거란은 사신을 보내어 친교를 맺으려 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거란이 발해를 멸하였을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야만의 나라로 생각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고려는 송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면서 북방의 거란이나 여진 등 문화가 낮은 북방 민족들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멀리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들 북방 민족이 강성하여, 한때 고려를 침입하고 압력을 가해 왔다. 이에 고려는 세 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입을 막아 내었고, 여진을 정벌하였다.
한편 979년에 통일을 이룩한 송나라가 985년(성종 4년)에는 고려에 한국화(韓國華)를 보내어 거란 협공을 제의하였다. 또한 송나라는 압록강 중류에 세워진 발해유민의 독립국가 정안국(定安國)과 해상을 통해 내왕하며 거란을 협공할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거란(요)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거란으로서는 이후 고려침공의 빌미가 되기도 하였다.
그 후 고려는 송과 외교 관계를 맺고 거란과의 국교를 거부하였을 뿐 아니라, 국경 지대에 여러 성을 쌓아 북방에 대한 경비를 엄히 하였다. 이에 송과 대립하고 있던 거란은 고려에 침입하여 왔다.
송의 시대 배경
9세기 말 일어난 대규모의 농민 봉기로 중국의 중앙권력은 약해진다. 이에 따른 반발로 중국 북동부의 지배권은 거란(요)에게 넘어가 만주와 내몽골 일대에 그들의 제국이 세워졌다. 북서부에서도 탕구트족에 의해 ‘서하’라는 강력한 왕국이 들어섰다. 이후 이들 지역은 1368년 까지 이민족 세력들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다가 5대의 마지막 국가였던 후주에서 궁정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새로 세워진 송 왕조가 권력을 탈취한다. 이후 송은 군사와 정치 양면에서 출중한 통치자의 지휘 아래 중국을 재통일 시키고 결사적으로 북부 이민족들의 휘협을 무력화하기 위한 노력을 펼친다. 아울러 송대는 급속한 경제 성장이 이루어진 시기이기도 했다. 750년 부터 1100년 사이 중국의 인구는 거의 두배로 불어났고 지폐사용으로 교역이 활성화되면서 대규모 산업단지가 송의 초창기 수도인 개봉 일대에 집중되었다. 하지만 북부 변경지대 방비는 허술하여 거란의 확장을 막을수 없게 된다.
고려거란전쟁 역사
1차 고려거란전쟁 : 993년
993년(성종12년) 거란(요나라)의 동경유수 소손녕이 80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한다.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방양유 와 서희를 보내 막는 한편 성종이 안북부 까지 나아가 전선을 지휘 하였다. 하지만 공산군(봉산탈춤의 고장)을 빼앗기고 서경으로 돌아왔다. 고려 조정은 대궐로 돌아가 항복을 청하자는 ‘항복론’ 과 서경 이북의 땅을 거란에게 넘겨 주자는 ‘할지론’ 을 주장 하였다. 성종도 이에 따르게 되는데 이때 역사의 변곡점이 발생한다.
거란의 소손녕은 안융진 공격을 실패하자 거란의 남하가 저지 당한다. 이런 이유로 고려에 화친을 제안하는데 고려 조정은 서희를 급파하여 역사적 ‘서희의 단판‘ 이 이루어진다. 당시 안융진성의 ‘대도수’ 와 ‘유방’ 의 활약이 있었다.
서희의 단판
서희의 회담 전략은 여진족이었다. 고려는 거란에 대한 조빙(거란을 왕의 나라 , 고려를 신하의 나라로 지창)을 원하고 있으나 여진이 거란(요나락)으로 가능길을 막고 있기 때문에 강동 6주를 얻게 해 준다는 조건으로 조빙을 하기로 한다.
거란도 송나라와 전쟁 중이었으므로 배후의 고려가 송을 돕게 된다면 연합이 형성되기 두렵기 때문에 그 가능성을 배제 하고자 고려와 친교협상을 맺거나, 송나라와의 관계를 접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주적인 송나라를 치기 전 고려와 협상을 밎어 배후를 안정시키려고 했던 것일 뿐 고려에 국력을 소비할 필요가 없었다.
소손녕은 서희와의 담판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는 우리 소유인데도 너희들이 침략하여 차지했다. 그리고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음에도 바다를 건너 송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오늘의 출병이 있게 된 것이다. 만약 땅을 분할해 바치고 조빙을 잘 한다면 무사할 것이다”
그러자 서희는 이에 대해 소손녕의 말을 반박하였다.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이다. 그 때문에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한 것이다. 국경 문제를 두고 말한다면, 요나라의 동경도 모조리 우리 땅에 있어야 하는데 어찌 우리가 침략해 차지했다고 하는가? 게다가 압록강 안팎은 우리 땅인데, 지금 여진이 그 땅을 훔쳐 살면서 완약하고 교활하게 거짓말로 길을 막고 있으니 요나라로 가는 것은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어렵다. 조빙이 통하지 않는 것은 여진 때문이니, 만약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영토를 돌려주어 성과 보루를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해준다면 어찌 감히 조빙을 잘 하지 않겠는가”
이 회담으로 요군은 물러갔고 고려는 지금의 평안북도 서부 일대인 청천강 이북 압록강 이남의 280리 영토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고려는 새로 얻은 영토에 6개 주를 설치하니 이곳이 바로 강동 6주[10]이다. *강동 6주는 2차, 3차 거란의 침략을 막아낼수 있었던 매우 주요한 방어 거점이 된다.
매우 절묘한 외교적 승리라 할수 있다. 혹자는 외교를 넘어 국정 설계자로서 서희를 평가 하고 있다. 이후 거란 침략을 대비해 우리가 싸울 수 있는 전략적 토대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래서 위대한 국정 지휘자 라 평가 한다.
2차 고려거란전쟁 : 1010년
조빙관계를 유지하던 고려가 ‘강조의 정변’으로 목종이 패위되고 현종이 직위한다. 이 정변을 구실로 삼아서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이유로 40만 대군을 일으켜 요나라 성종은 고려를 침공하게 된다.
2차 고려거란전쟁에서 거란의 진짜 의도는 송나라와의 교류를 완전히 막아 고려와 거란간의 관계를 다시 확인시키고, 강동 6주를 찾으려는데 있었다.
거란군은 먼저 홍화진을 공격했으나 홍화진의 성주 양규의 활약으로 함락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란은 40만 대군 중 20만은 홍화진을 공격하고 20만은 남하한다. 현종은 강조에게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통주에서 거란을 막게 하였으나 크게 패한다. 거란은 곽주성, 안주성 등을 함락시키고 개경까지 함락시켰다. 이에 고려는 다시 항복론이 대두되었으나, 강감찬의 반대로 현종은 나주로 피신한다. 거란군은 개경은 함락 했지만 홍화진, 곽주, 통주, 서경, 등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병참이 차단되어 있었다.
이에 고려는 화친을 청하고 현종이 친조 한다는 조건으로 이를 받아 들이고 2차 고려거란 전쟁이 마무리 된다.
이는 홍화진, 곽주 등에서 활약한 양규의 활약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 된다.
양규의 활약
2차 고려거란전쟁의 영웅은 홍화진의 성주 양규라 할 수 있다. 거란의 40만 대군을 막을 뿐 아니라, 20만으로 나누어진 거란군이 남하하자 1000여명의 군사를 모아 곽주성으로 잠입하여 거란병사을 몰살시키고 곽주성을 탈환 한다. 홍화진, 곽주 등 중요한 거점을 방어하게 되어 고려거란 전쟁의 종식에 혁혁한 공적이라 할 수 있다.
평화협상을 한 이후에도 양규의 활약은 지속 된다. 1011년 거란군이 철수하게 되자 부하 김숙흥과 함께 거란2000을 죽이고 고려인 포로 2.000여명을 구출한다. 석령에서 다시 거란을 3000여 명을 죽이고 고려인 1000여명을 구출 한다.
여러참에서는 거란군 1000여명을 죽이고 고려인 1000명을 구출했고 다시 거란의 선봉과 예전에서 1000여명의 거란군을 베었다. 그리하여 고군에서 순울 사이에 7차례 거란군을 급습해 적 6,500여명을 죽이고 고려인 포로 3만명을 구출한다.
1011년 3월 5일 , 퇴각하는 거란을 끝까지 추적하다 전투에 군사화 화살이 다 떨어져 김숙홍과 함께 거란의 주력부대에 항전하다가 전사하게 된다.
2차 고려거란전쟁은 양규의 활약으로 역사가 바뀌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덕분에 전쟁이 끝이 났지만 양규는 멈추지 않는다. 다시는 고려를 넘보지 못하게 한명의 적도 온전히 돌아가지 못하게 하기위해 삶을 다할때까지 싸웠다. 이는 조선 임진왜란때 노량해전에서 의 이순신과 같은 의미를 둔다.
3차 고려거란전쟁 : 1018년
2차 전쟁 이후 고려 현종은 거란과 국교를 끊고 송나라와 다시 교류 하였다. 1018년 12월 거란의 소배압은 10만 군대를 끌고 다시 고려땅을 밟는다.
1차, 2차 의 전쟁으로 고려는 3차 침공을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는 서북면행영도통사 감감찬을 상원수로 삼아 20만 대군으로 대비하였다. 여기서 거란은 10만 고려는 20만 이라 이후 고려의 승리가 당연하다라는 주장도 있지만 거란의 10만군은 모두 정예기병이었다.
거란의 전략은 성을 공략하지 않고 바로 개경으로 진군하는 전략을 꾀하였다. 이에 고려는 현지 보급을 하지 못하도록 성 이외의 지역은 모두 비우는 청야전술로 대비한다.
첫번째 충돌은 흥화진 전투에서 고려는 1만 2천여 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이르자 막았던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 혼란에 빠진 거란군을 크게 무찔렀다.
거란군은 초반부터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후퇴하지 않고, 고려군의 이어진 공격을 피하여 개경으로 나아가다가 자주(慈州)에서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으며, 고려군의 청야 전술로 인해 식량 공급에도 큰 차질을 빚었다. 소배압은 다음 해 정월 개경에서 멀지 않은 신은현(新恩縣)에 도달했으나 개경을 함락할 수 없음을 깨닫고 군사를 돌려 퇴각하였다.
귀주대첩
결국 수도 개경에서 약 100리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신은현에 도착한 거란군은, 또 한번 강감찬의 청야 작전에 당하고 만다. 개경에 정찰병을 보냈지만, 개경의 방어가 왕성하다는 첩보를 들은 소배압은 후퇴를 결심하게 된다. 추격하는 고려군을 막기 위해 약 300명 정도의 기병대를 배치해 두었지만, 이들은 금교역에서 고려군의 습격에 전멸하고 만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퇴각하던 거란군은, 연주에서 또다시 고려군에게 패배한다.
며칠 뒤, 거란군은 귀주를 지나게 되었다. 강감찬은 귀주에서 수만의 대군을 이끌고 기다리고 있었다. 양군은 힘을 다해 싸웠고, 쉽사리 승부가 갈리지 않았다. 강감찬의 연락을 받고 개경에서 올라온 김종현의 부대가 거란군의 후진을 습격하면서, 거란군은 완전히 참패하고 북으로 달아났다. 고려군은 반령까지 거란군을 추격하다 군사를 돌이켰다.
거란은 거의 전멸 되었다 10만여명의 정예기병이 귀주대첩 이후 1000명 남짓 생존하여 돌아간다.
이후 거란은 다시 고려를 침략할 수 없게 된다.
인사이트
거란(요나라)는 고려 침략에 실패하여 요동에서의 지배권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고려가 있는 한 송나라를 쳐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려-송나라-요나라 3국의 대등한 세력 균형이 형성되었다. 이후 거란(요나라)는 여진족에게 패망하게 된다.
고려 거란 전쟁은 양, 두나라만의 전쟁은 아니었다. 거란은 급격하게 국력이 약해져 이후 여진족에 패망하게 된다.
고려 와 송나라는 몽골의 확장 이전까지 중흥기에 접어든다. 고려거란전쟁은 결국 고려의 승리였다.
이때의 서양은
비잔틴(동로마) 시대를 지내고 있으며 튀르크 민족의 확장으로 비잔틴 제국의 영토는 차츰 잠식당하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십자군 전쟁 발발 직전의 상황 이었다.